그림이야기 : 그림에도 규격이 있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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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야기 : 그림에도 규격이 있었다니...

유럽과 국내의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거닐며 거장들의 대작 앞에 설 때마다 늘 품었던 소박한 궁금증이 하나 있었다. '왜 서양화는 예나 지금이나 하나같이 네모난 나무 틀에 천을 씌운 캔버스에 그렸을까? 자유로운 영혼의 예술가들이라면 재질이나 캔버스 모양이나 크기도 제각각 마음대로 정해서 그렸을 텐데...' 그림에 대해 무지하던 시절에는 그저 화가들이 아무것이 되었던(나무나, 천이나 종이 등 쓰고 싶은데로) 그림 그리는 바탕이 그저 캔버스려니 하고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실 캔버스의 의미를 제대로 안 것은 몇달전...ㅠㅠ)

하지만 그 익숙함 뒤편을 들여다보니, 미술사 전체를 관통하는 거대한 물류의 혁신과 재료의 표준화, 그리고 F(인물), P(풍경), M(해상)으로 나뉘는 엄격한 호수(규격)의 비밀이 숨어 있었다.

르네상스 이전만 해도 유럽에서는 무겁고 두꺼운 나무 판자(목판)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 기본이었다. 그러나 목판은 조금만 커져도 옮기기 힘들 만큼 무거워졌고, 온습도 변화에 따라 쉽게 휘거나 결을 따라 갈라지기 일쑤였다.

15세기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일어난 '캔버스(천)+나무 틀'의 도입은 회화의 판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산드로 보티첼리는 당시 목판 대세의 흐름 속에서 대형 캔버스 바탕재를 선구적으로 거의 최초에 도입하여 《비너스의 탄생》 같은 명작을 남긴 화가이기도 하다. 가볍고, 대형화가 가능하며, 필요하면 틀에서 떼어내 말아서 이동할 수 있는 유연함. 거기에 19세기 산업혁명 이후 표준 규격의 호수(1호, 10호, 100호 등)와 나무 틀이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기 시작하면서, 작가들은 어디서든 규격화된 화폭을 저렴하고 쉽게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자유로움의 상징이라 생각했던 화가들이 실은 가장 효율적이고 완벽하게 정립된 '기술적 표준 규격' 위에서 창작을 펼쳐왔던 셈이다.

캔버스 규격(호수)의 비밀: F, P, M이란 무엇인가?

미술용 캔버스의 표준 규격은 프랑스에서 정립되어 오늘날까지 쓰이고 있다. 흔히 말하는 '몇 호'라는 숫자는 그림의 가장 긴 변의 표준 길이를 뜻한다. 그리고 호수 뒤에 붙는 F, P, M은 그림의 주제에 따라 비율을 다르게 만든 법칙이다.

일반적인 가로형 캔버스 기준으로 보면 가장 긴 변의 길이는 같지만, F ->P -> M으로 갈수록 세로폭(높이)이 더 좁아지는 구조를 가진다.

  • F (Figure / 인물형): 세로폭이 가장 깊고 넉넉하여 인물 상반신과 배경을 안정적으로 담는 기본 규격 (비율 약 1 : 1.2~1.3)

  • P (Paysage / 풍경형): F보다 세로폭이 좁아져 시선이 옆으로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자연 풍경에 적합한 규격 (비율 약 1 : 1.4~1.5)

  • M (Marine / 해상형): 세로폭이 가장 좁아 가로로 길게 뻗은 시원한 와이드/파노라마 규격 (비율 약 1 : 1.6~1.7)

주요 호수별 실제 치수 (단위: cm)

호수 (Size)F (Figure / 인물)P (Paysage / 풍경)M (Marine / 해상)
1호22.7 × 15.8 cm22.7 × 14.0 cm22.7 × 12.0 cm
3호27.3 × 22.0 cm27.3 × 19.0 cm27.3 × 16.0 cm
6호40.9 × 31.8 cm40.9 × 27.3 cm40.9 × 24.2 cm
10호53.0 × 45.5 cm53.0 × 40.9 cm53.0 × 33.4 cm
20호72.7 × 60.6 cm72.7 × 53.0 cm72.7 × 50.0 cm
50호116.8 × 91.0 cm116.8 × 80.3 cm116.8 × 72.7 cm
100호162.2 × 130.3 cm162.2 × 112.1 cm162.2 × 97.0 cm

예를 들어 똑같은 100호 크기라도, 가장 긴 변을 162.2cm로 고정해 둔 상태에서 인물을 그릴 때는 세로폭이 넉넉한 130.3cm(100F)를 쓰고, 탁 트인 바다의 수평선을 담을 때는 세로폭을 97.0cm(100M)로 바짝 줄인 와이드 화폭을 선택했던 것이다.

이렇게 규격화된 수치와 법칙을 알고 나니 미술관의 풍경이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규칙이나 틀에 매이지 않을 것 같던 화가들이 실은 이 효율적이고 정교한 인물, 풍경, 해상의 가로세로 비율을 완벽하게 계산하여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펼쳐 보였다는 사실이 새삼 경이롭다.

자유로운 예술적 영혼과 엄격한 재료 규격의 만남. 미술관의 네모난 캔버스들은 단순한 나무 틀이 아니라, 수백 년에 걸쳐 정립된 가장 완벽한 기술적 표준 위에서 거장들의 영혼과 정서를 담아내는 가장 단단하고 아름다운 '예술의 바탕'이었던 셈이다.

《산드로 보티첼리 - 프리마베라(Primavera / 봄, 1482년경)》 


보티첼리의 《프리마베라》은 현대의 캔버스 표준 규격(호수 체계)이 정립되기 훨씬 전인 15세기 르네상스 시기(1482년경)에 그려진 작품이므로, 현대의 '몇 호'라는 규격 수치와 정확하게 딱 맞아떨어지지는 않는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F, P, M 규격 체계는 19세기 프랑스에서 산업혁명 이후 유화 물감 튜브와 캔버스 틀을 대량 생산하고 물류 표준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정립된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다만, 현대의 호수 체계에 비추어 작품의 실제 크기를 비교해 보면 약 P300호 ~ P400호 사이의 엄청난 크기에 해당한다. 비율은 1: 1.55로 현대의 P형(Paysage,페이자주)에 해당한다.

  • 《프리마베라》 실제 치수: 314 cm x 203 cm (가로x세로)

  •  현대 캔버스 300호(300P) 표준 치수: 290.9 cm x 197.0 cm

  •  현대 캔버스 400호(400P) 표준 치수: 333.3 cm x 218.2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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