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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을 만나다: 엔지니어의 눈으로 본 단원 풍속도첩
나룻배- 저 무거운 배는 정말 사공 한 명으로 움직였을까?
1. 이곳은 어디인가?
그림을 처음 볼 때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묻습니다. "이게 대체 어디야?" 단서는 그림 안에 이미 다 있습니다. 인물들이 도포와 갓 차림으로 오가는 것, 소 등에 잔 나뭇가지를 실어 나르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이 정도 규모의 배가 오르내릴 만큼 큰 강이 흐른다는 것 — 이 세 가지를 모으면 공간은 자연히 한양도성 언저리로 좁혀집니다. 공식 역사 자료에서 이 화폭은 그저 ‘나루터’로 소개되지만, 제 눈에 이 정도 규모의 대도시 관문이라면 조선 시대 핵심 나루였던 한강진을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 물론 광나루에서 내려온 물자가 꼭 한강진으로만 향했으리라 단정할 수는 없지만, 도성의 남쪽 문턱을 지키던 그 거대한 수운의 풍경을 그릴 때 저는 이곳을 한강진의 한 조각으로 보고 싶습니다.
이곳을 한강진이라는 가설 아래 두고 보면, 배가 두 척이라는 사실도 훨씬 흥미롭게 읽힙니다. 위쪽 배와 아래쪽 배. 이 둘을 서로 다른 시간의 장면으로 읽고 싶은 유혹도 들지만, 번잡한 물류 거점이라면 어느 한순간에도 배가 한 척만 떠 있을 리 없습니다.
저는 이 두 배를 이렇게 읽고 싶습니다. 짐을 잔뜩 싣고 막 들어오는 배와, 짐을 다 부리고 나가는 빈 배가 같은 시각, 같은 강 위에 나란히 떠 있는 것 — 그것이 이 나루터의 평범한 일상이라고 말입니다.
위쪽 배는 짐이 산더미입니다. 황소 등에 얹힌 잔 나뭇가지 더미가 뱃전을 넘어 넘실거리고, 사람들은 그 틈바구니에 옹골차게 몸을 붙이고 앉아 있습니다. 반면 아래쪽 배는 무거운 땔감 짐을 다 털어내고 가벼워진 몸으로 길을 떠나는 배이고 사람들의 자세도 한결 느슨합니다. 위쪽 배는 짐을 가득 싣고 이제 막 도착하려는 만재의 모습이고, 아래쪽 배는 그 짐을 도성 어딘가에 다 부려놓고 빈 몸으로 다시 상류를 향해 거슬러 올라가는 공선의 모습으로 읽힙니다.
여기서 배에 탄 사람들의 자세와 시선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광나루에서 이곳 한강진까지 배를 타고 오는 두어 시간의 긴 여정 동안, 사람들은 불안정한 뱃전에서 결코 서서 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고단하게 몸을 웅크리고 앉아 앞을 응시하던 그 시선의 끝에 마침내 도심의 풍경이 들어차는 터입니다.
반면에 이제 막 출발하는 아래쪽 배의 인물들 중 일부는 여전히 서서 뭍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떠나보내는 이에 대한 아쉬움이 남았거나 마지막 헤어짐의 인사를 건네느라, 아직 배가 완전히 물살을 타기 전 뱃머리에서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하는 것입니다. 짐의 채움과 비움뿐만 아니라, 이 앉아 있음과 서 있음의 대비 속에는 나루터라는 공간이 품은 일상의 서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3. 소와 짐의 비밀
배 위에서 가장 눈에 띄는 존재는 단연 위쪽 배의 육중한 황소 두 마리와 아래쪽 배의 황소 및 당나귀들입니다. 이들이 짊어지고 있는 짐의 정체는 바로 조선 시대 도성민들의 겨울 난방을 책임지던 잔 나뭇가지(땔감)입니다. 덩치 큰 나무를 통째로 싣기보다, 촘촘하게 묶은 잔가지들을 소 등의 길마(짐을 얹는 나무 틀) 위에 산더미처럼 얹어 나른 것입니다.
여기서 엔지니어로서 주목하게 되는 대목은 소의 배치와 선체 바닥에 깔린 짐들입니다. 도착하는 배 안을 보면 두 마리의 황소가 선체 중앙에서 살짝 앞쪽 위치에 서로 보는 방향을 교차하여 서 있고, 그 발치와 빈틈마다 사람들이 챙겨 온 무거운 짐들이 낮게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좁은 선체에서 하중을 효율적으로 분산시키기 위한 배치로 읽고 싶습니다. 덩치 큰 소와 무거운 짐들이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무게 중심이 흐트러지면 배는 순식간에 전복될 수 있으므로, 그것들을 중앙선에 맞춰 교차하고 분산되게 배치하여 좌우 밸런스를 단단히 잡아준 것입니다.
4. 계절과 시간은?
그림 속 사람들을 한 명씩 뜯어보면 계절의 기운도 어렴풋이 감지됩니다. 갓을 쓴 양반, 삿갓을 쓴 상인과 뱃사공, 그리고 무거운 길마에 잔 나뭇가지를 산더미처럼 얹은 채 묵묵히 버텨내는 황소와 당나귀들입니다. 이들의 옷차림에서는 추위를 어느 정도 의식한 흔적이 느껴집니다. 여기에 짐의 종류를 더하면 상상은 더 선명해집니다. 나무를 이렇게 대량으로 실어 나른다는 것은 곧 다가올 추위에 대비한 땔감 수요가 무르익었다는 뜻입니다. 계절을 굳이 특정한 달로 못 박을 필요는 없지만, 저는 이 그림에서 다가올 겨울을 앞둔 서늘한 냄새를 맡습니다. 한 해의 노동이 갈무리되고 매서운 추위를 견디기 위해 온 도심의 생업이 바삐 움직이는 그 계절의 공기 말입니다.
시간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짐을 가득 실은 배가 나루에 닿는 참이라면, 광나루에서 손님을 기다려 승선료를 정산하고 배에 올라 한강진까지 건너오는 데 2시간은 족히 걸렸을 테니, 이른 아침보다는 해가 중천에 오른 한나절일 가능성이 큽니다. 나루터의 일이란 해가 뜨기 전부터 움직여 해가 지기 전에 도성 안으로 짐을 밀어 넣어야 끝나는 일이니, 이 그림은 그 분주한 생업의 한낮을 붙잡아 둔 것입니다.
5. 돌쇠의 1박 2일 여정
물론 여기서부터는 철저한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그림에서 출발해 제가 마음껏 펼쳐본 한 편의 상상입니다. 남양주 별내 산골에 사는, 이 그림 속 어딘가에 있을 법한 나무꾼의 이름을 ‘돌쇠’라고 붙여보겠습니다. 돌쇠의 하루는 찬바람이 뼛속까지 파고드는 새벽녘, 남양주 별내의 집을 나서면서 시작됩니다. 황소 등에 굵은 짚동으로 엮은 잔 나뭇가지를 산더미처럼 얹고, 굽이진 들길과 산길을 따라 묵묵히 3시간을 걸어 내려와 마침내 광나루에 닿습니다. 하지만 나루터 풍경은 이미 벌써 사람들이 잔뜩 몰려 북적이고 있습니다. 벌써부터 배를 타겠다고 줄을 선 사람들 틈에서 서로 새치기를 했네 아니네 하며 목소리를 높이고 옥신각신 난리가 납니다.
여기서 제가 어릴 때 버스터미널의 추억을 살포시 꺼내어봅니다. 그때는 예매 시스템도 없던 때라 무조건 줄을 서서 표를 사고 버스를 타곤 했는데, 긴 줄에 언제 표를 살 수 있을지 기약을 몰라 중간에 슬쩍 지인이 있는 척하며 새치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누가 또 그걸 발견하기라도 하면 서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몸을 밀쳐내며 악을 쓰고 싸우던 그 난리통 같았던 시절이 생각납니다. 젊은 시절 명절에 고향을 오가기 위해 표를 사고 기다렸던 시외버스 터미널 풍경이 문득 겹쳐지는 순간입니다.
이어 뱃삯과 도선세를 치르고 짐을 가득 실은 배에 오르면, 본격적인 물길 도하가 시작됩니다. 그 소란을 뚫고 겨우 배에 오른 뒤에는 물결의 흔들림에 놀라 거친 숨을 몰아쉬는 황소의 고삐를 바짝 쥐고 콧등을 쓸어내리며 진정시킵니다. 순류를 탄 배가 두어 시간 만에 건너편 한강진에 닿고, 두어 시간이 더 걸려 도성 안으로 들어가 시장바닥에 땔감을 다 털어내고 나서야 비로소 숨을 돌립니다. 마침내 무거운 짐을 벗고 길게 콧김을 뿜어내는 황소의 입에 소금물을 먹여 목을 축여줍니다. 소에게 소금물을 먹이는 옛 축우 관리 관행을 떠올려 보면, 이것은 고된 노동을 마친 짐승에게 건네는 조선시대 식의 이온음료이자 가장 따뜻한 위로인 셈입니다.모든 일과를 마치고 나면 돌쇠의 손에는 하루를 버텨낼 품삯 엽전 몇 푼이 쥐어집니다.
해가 저물면 성문 밖 어느 주막에서 소에게 소금 친 콩깍지 여물을 먹이고, 돌쇠 자신도 짚더미 위에서 깊은 잠에 빠져듭니다. 이튿날, 짐을 다 비워 가벼워진 빈 길마를 다시 소 등에 얹고 배에 오릅니다. 이번엔 역류입니다. 뱃사공이 온종일 땀을 쏟으며 노를 저어 강을 거슬러 올라 4시간이나 지나 광나루에 이른 뒤, 거기서부터 다시 3시간의 고된 들길과 산길을 걸어 해질녘이 되어서야 별내의 집 마당으로 돌아오는 길입니다.
사람 하나와 소 한 마리가 잔 나뭇가지 몇 짐을 도성에 넣기 위해 들이는 이 1박 2일의 루프는, 그림 속에는 그려지지 않았지만 분명 그 시절의 강물이 품고 있던 진짜 무게였을 것입니다.
6. 배마다 고작 한두 명의 사공뿐인가?
여기서부터는 엔지니어인 제 직업병이 시작됩니다. 배 위에 실린 것들을 눈으로 가늠해봅니다. 잔 나뭇가지 더미의 부피와 무게, 한 마리당 거뜬히 500kg을 호가하는 위쪽 배의 육중한 황소 두 마리와 아래쪽 배의 황소 및 당나귀들의 어마어마한 중량, 그리고 빽빽하게 들어찬 승객들의 체중까지 더하면 배에 실린 총중량은 가볍게 수 톤을 넘습니다. 엔지니어 눈에는 뱃전이 지나치게 낮아 보입니다. 저 정도로 사람들이 몰려 있다면 배는 조금만 한쪽으로 쏠려도 위험했을 터입니다.
여기서 배의 움직임을 지배하는 세 가지 주요 동력학적 요소를 떠올려 보게 됩니다. 배가 물 위를 나아갈 때 좌우로 흔들리는 롤링(Rolling), 선수가 진행 방향에서 좌우로 틀어지는 요잉(Yawing), 그리고 앞뒤가 울렁이며 출렁이는 피칭(Pitching)이 그것입니다. 전통 나룻배의 앞부분인 이물(선수)과 뒷부분인 고물(선미) 사이로 무거운 하중이 실린 채 거친 물살을 헤쳐야 합니다.
언뜻 보면 화폭 속 하중이 앞쪽으로 쏠려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위쪽 배와 아래쪽 배 모두 소의 위치가 선체 중앙에서 살짝 앞쪽, 즉 이물 쪽으로 치우쳐 있을 뿐만 아니라 두 마리의 덩치가 미묘하게 엇갈린 지그재그 형태를 이룹니다. 위쪽 배의 500kg에 달하는 거구 둘(황소)과 아래쪽 배의 가축들이 배 위에서 미세하게 움직일 때 발생하는 편심 하중을 상쇄하기 위한 배치였을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우선 좌우 흔들림인 롤링을 제어하기 위한 첫 번째 물리적 조치입니다.
그런데 소가 중앙보다 살짝 앞쪽에 치우친 데에는 또 다른 이유, 즉 전후 흔들림인 피칭과 관련한 이유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림 전체를 꼼꼼히 살펴보면 고물(뒷부분) 쪽에서 선체를 조율하고 노를 저어야 할 뱃사공들의 모습이 화폭 안에서 생략되어 있거나 극도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만약 실제 운항을 위해 뒤쪽에 실려야 할 조향 인력의 무게까지 고려한다면, 소와 짐의 하중이 오히려 이물 쪽으로 살짝 이동해 있어야만 배 전체의 전후 무게 중심이 극적으로 맞아떨어지게 됩니다. 즉, 화폭에 그려지지 않은 뒷쪽의 인력 공백까지 염두에 두고 소를 미세하게 앞쪽에 배치한 것은, 앞뒤로 배가 시소처럼 끄덕이는 피칭을 억제하기 위한 동력학적 균형의 산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완벽한 밸런스 포인트 위에 짐승을 교차시켜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이 거대한 만선을 통제하려면 고물에서 방향을 잡는 사공 외에도 물의 저항과 롤링을 통제할 손길이 더 필요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그림을 보면 사공이 많아 보이지 않습니다. 정말 저 정도 인원으로 이 무거운 배를 움직일 수 있었을까요?
물론 이것은 고증의 오류라기보다는 화가의 압축으로 읽힙니다. 만약 단원이 사공 서넛을 화폭에 바글바글하게 그려 넣었다면, 시선이 그쪽으로 쏠려 정작 이 그림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 — 좁은 배 위에서 서로 눈치를 보며 몸을 붙이고 앉은 다양한 인간 군상 — 가 흐려졌을 것입니다. 화가는 배를 통제하는 상징적 인물만을 남겨두고 나머지는 과감히 생략했습니다.
앉은 사람과 선 사람이 나뉜 모습도 눈여겨볼 대목입니다. 도성에 도착하는 위쪽 배는 두어 시간은 걸려 건너왔을 테니 다들 앉아서 왔을 테고, 거의 도착한 시점에 사공은 위험하니 앉아 있으라고 해도 성질 급한 사람이 이를 무시하고 구경하려고 몇 명 서 있는 것입니다. 저 좁은 배에서는 사람 하나가 일어서는 순간에도 배가 반응했을 테니, 승객들이 옹골차게 앉아 있는 그 자세 자체가 배의 무게중심을 잡아주는 가장 현실적인 동력학이었던 셈입니다.
7. 단원이 남긴 여백
단원 김홍도는 나루터의 모든 물리적 법칙을 세밀하게 그려내지 않았습니다.
사공의 숫자를 줄였고, 물결의 저항을 생략했고, 돌쇠라는 이름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두 척의 배,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두 개의 시간, 그리고 그 사이를 오가는 사람과 짐승의 자세만을 남겼습니다.
배는 짐을 싣고 내려가고, 빈 배는 다시 올라옵니다.
채움이 있으면 비움이 있고, 도착이 있으면 출발이 있습니다.
강은 그 일을 하루도 빠짐없이 반복합니다.
단원은 그저 그 한순간을 그렸을 뿐입니다.
그런데 삼백 년 뒤 저는 그 작은 배 두 척을 보며, 그때의 세상이 얼마나 정확하게 움직이고 있었는지를 계산하고 있습니다.
댓글
인터넷의 일부 글에서 위 그림을 갖고 "사공은 한 명이 맞고 두 명은 틀리다"고 단정하는 것을 봤는데 이는, 전통 선박의 실제 운용 구조와 역사적 사실, 그리고 조선 후기 도선(渡船)의 실태를 전혀 모르는 피상적인 주장입니다.
답글삭제1. 조선 시대 관도선·사도선의 사공 정원 고증
조선 시대 법전과 각 읍지, 한강 수운 기록을 보면 나룻배의 승무 인원은 배의 크기와 물길에 따라 엄격히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경국대전 및 속대전의 규정: 한강과 삼남을 잇는 주요 관진(官津)의 평저선(진선·도선)에는 통상 선인(사공) 2명에서 4명이 배치되었습니다.
노와 삿대의 역할 분담: 앞쪽(이물)에서는 물길의 암초를 피하고 접안 시 삿대를 대는 앞사공(선수 사공)이 필요했고, 뒤쪽(고물)에서는 길고 무거운 키(타)나 조설(치/고물 노)을 잡고 방향과 전진력을 제어하는 도사공(선미 사공)이 반드시 있어야 했습니다.
급류와 역류 제어: 한강의 도하 구간은 폭이 수백 미터에 이르고 계절별 여울과 유속이 강합니다. 특히 승객 20여 명에 황소 두 마리(약 1톤 이상), 땔감 수 톤이 실린 만재 평저선을 성인 남성 한 명의 완력으로 거친 강물에서 횡단하거나 접안시키는 것은 유체역학적으로 불가능에 가깝습니다.